리만머핀 서울은 1월 22일부터 3월 15일까지 앤디 세인트 루이스 기획의 《숭고한 시뮬라크라》를 개최한다. 본 전시에서 풍경화는 지각의 새로운 양식을 향해 열린 변곡점이다. 김윤신, 김창억, 홍순명, 스콧 칸의 작품을 불러 모은 이번 전시는 풍경화의 잠재력, 즉 이미지가 자연환경에 대한 경험을 매개하는 변화된 방식에 주목한다.
이미지의 궁극적인 실체를 최초로 파고든 플라톤에 의하면, 재현은 두 가지 종류로 분류된다. 하나는 정확한(“진실된”) 재현이고, 다른 하나는 일부러 왜곡된(“거짓된”) 닮음이다. 보드리야르의 역작 『시뮬라시옹』(1981)은 플라톤의 이론을 확장하여 원본을 참조하지 않는 모방으로서의 시뮬라크럼(simulacrum) 개념을 창안했다. 포스트모던 예술 담론에서 시뮬라크라는 주로 실증적인 경험에 의거하지 않은 재현의 재현(복제본에 의거한 복제본)으로, 실재와 상상 사이의 경계를 흐리기에 이른다. 대체로 객관적 현실과 주관적 재현을 근본적으로 구별할 수 없다고 전제하는 포스트모던 사유에서는 실재를 매개하는 시뮬라크라가 관건으로 떠오른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재현이 너무도 생생하여 그 자체로 현실 혹은 초현실을 탄생시켜 실재의 헤게모니를 파괴하고, 지각과 믿음 사이의 인지적 연결을 재정립하기에 이를 때, 시뮬라크라가 절정에 이른다.
《숭고한 시뮬라크라》는 시뮬라크라에 달라붙은 부정적 내포를 끊어내고, 이 개념을 보다 넓게 해석하여 미술이 풍경에 개입하는 방식을 살피고자 한다. 유기적 추상, 기하학적 구상, 리얼리즘과 초현실주의의 시각 언어를 가로지르는 출품작은 각 작가의 개념적 입장과 제작 과정에 따라 이미지와 그것이 재현하는 현실이 맺는 다양한 관계의 양상을 펼쳐 보인다. 풍경화라는 렌즈를 통해 시뮬라크라의 변증법을 재고함으로써 이 전시는 형언할 수 없는 것의 묘사를 진정성의 원숙한 표현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60여 년 작품 활동을 이어온 김윤신의 조각과 회화는 줄곧 자연에 대한 인상을 추상적으로 다루기 위한 특별한 매체로 사용되었다. 단단한 목재 덩어리로부터 형태를 취하기 위해 사용한 전기톱과 수공구부터 캔버스에 2차원 모양을 드러내는 물감을 가로질러 김윤신의 작품은 활력으로 가득 찬 시각 세계를 펼친다. 나아가 김윤신은 자연환경의 리듬과 공명에 예술적 의식을 조율하여 영적인 것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예술과 삶, 주체와 객체, 재현과 현실의 경계 소멸을 성취한다.
리얼리즘으로부터 명백하게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윤신의 회화는 이분법적 존재론에 저항함으로써 회화의 내재적 기능이 다름 아닌 시뮬라크라라는 점을 받아들인다. 풍경의 본질 그 자체를 표현함으로써 그의 회화는 무언가를 선명하게 환기하는 표현으로 작동한다. 이 현실화는 작가의 체현한 경험에서 온 현실에 대한 감수성을 재현하고, 강렬한 색, 유기적인 질감, 식물적 구조로 가득한 중첩된 구성에서 볼 수 있듯 이 세계의 자연 질서로부터 취한 형식을 펼친다. 시뮬라크럼을 현실에 대한 “타락한” 복제물에 불과한 것으로 폄훼한 플라톤과 달리 김윤신의 작품은 회화 속 우주적 기운을 다원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이미지에 대한 기존 위계질서를 무력화한다.
김창억은 동세대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전후 근대 한국의 발전 양상과 발맞추어 여러 창작 단계에 걸쳐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초기 30여 년간 몰두한 기하학적, 상징적 추상부터 말년에 두드러진 직설적 구상까지, 생 전반에 펼쳐진 김창억의 예술적 여정에서 풍경화는 지속적인 영감의 원천이었다. 1970년 후반부터 1980년대는 이러한 양식의 변화를 일으킨 전환기에 해당하는데, 이 시기에 자연환경에 대한 표현이 가장 역동적으로 펼쳐졌다. 작품이 드러내는 절제된 주체성은 그림 같은 산, 숲, 개울을, 시선을 사로잡는 즉각성과 시간을 초월한 매력과 결합한다.
객관적 현실과 큰 상관이 없는 이미지에서 보다 분명하게 인식가능한 풍경으로 주의를 옮긴 김창억의 그림은 시뮬라크라의 영역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동시에 일정 정도의 현상학적 정동을 유지했다. 김창억은 단일하고 권위적인 관점을 고집하기보다 현실과 재현이라는 서로 다르지만 함께 가는 지각적 패러다임을 영민하게 종합하여 이들이 동시에 공유하는 관점을 도출했다. 이로써 김창억의 추상화된 풍경은 “실제” 풍경을 복제하려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유사한 감각 반응을 일으킨다.
다작의 회화 작품을 걸쳐 홍순명은 보도사진을 전유하여 그 주요 기능을 탈각하고 주변의 풍경에 집중한다. ‘사이드스케이프’ 연작에서 드러나는 부분적 묘사는 언제나 보이지만 동시에 영구히 간과되는 이미지를 드러낸다. 이처럼 중심 주제와 주변적 맥락을 교차 참조하는 전략은 관습적인 인지적 틀을 전복하여 이미지의 본질을 꿰뚫는다. 작가가 풍경화에서 지향하는 자연주의적 미감과 원본 사진의 날짜와 위치를 포함한 작품 제목의 특수성은 장면의 초점을 삭제하여 발생하는 혼선을 고조한다. 최근작이나 회화적 면모가 두드러지는 풍경화 연작 ‘낯설게 마주한 익숙한 풍경’에서는 작가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활용하여 직접 방문한 장소와 연관된 사적인 기억이 필연적으로 풍경화에 녹아 들었다.
작품 전반을 걸쳐 홍순명은 이미지의 독립성, 즉 소통의 역량을 떨쳐내고 내재적으로 오류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배열인 기표적 속성을 주장한다. 홍순명의 회화는 지각된 현상의 주관적 근사치를 내놓거나 물리적 현실에 대한 그럴듯한 대안을 암시하는 대신 시뮬라크라와 재구성된 풍경을 혼동하지 않는 메타-이미지로서 기능한다. 현실과 재현의 분리는 오늘날 고도로 매개된 시각문화에서 시급한 과제다. 그 앞에서 홍순명은 이미지가 아무리 외형상 정당해 보여도 그것이 복제라는 내재적 비현실로부터 온다는 이미지의 궁극적인 진리를 끌어낸다.
1970년대 말부터 스콧 칸은 지속적으로 언캐니한 형상화, 즉 원근법을 미묘하게 조작하고 안료를 정밀하게 사용하여 그린 모호한 풍경화를 전개했다. 이러한 접근은 초점의 무한한 깊이를 발생시켜 인간 시지각에 내재된 자연적 왜곡을 거스르고, 묘사의 리얼리즘을 훼손한다. 부피감 있는 나뭇잎이 만든 얼룩덜룩한 그림자, 미지의 목적지로 향하는 두드러진 길과 문, 기이한 분위기와 환경, 스케일의 비정상적 변주 등으로부터 스콧 칸의 대표적인 미감인 섬세함과 독특한 구성 논리를 엿볼 수 있다. 이는 수면과 각성 사이, 초현실적 정동이 스며 있는 환상적 상상력을 끌어내는 반(半) 의식의 경계 상태를 상기한다.
꿈과 초고도의 시뮬라크라와 마찬가지로 스콧 칸의 회화는 일종의 속임수다.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환상적 시뮬라크라를 현실과 환상을 혼동한, 원본이 무의미해진 시뮬레이션으로 분류했다. 이러한 정의가 의미를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스콘 칸의 작품은 특정 장소의 물리적 특징과 존재론적 부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하이퍼리얼하면서 현실에 매여 있지 않은 풍경은 객관적 현실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이를 대체할 수는 없는 잠재의식의 영역을 그린다. 그러나 스콧 칸의 작품에 스며 있는 시각적 기표들은 작가의 사적인 어휘에 직접 대응하기에 각자의 상상과 비교하며 작품을 만날 관객의 입장에서는 별세상 같고, 불가해한 장면으로 다가올 것이다. 풍경의 총체가 일으킨 감각적 반응이 정상적인 지각 너머 불가해한 영역에 다가갈 때마다 보드리아르가 제시한 시뮬라크라의 변증법은 초월적 숭고의 무게에 무너지고 만다. 순간의 인상은 현실적으로 재구성할 없으며, 이로써 풍경이 근본적으로 형언 불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예술가가 자연환경을 재현할 때 객관적 진정성이라는 개념을 아예 포기해 버리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오히려 예술가는 이성과 상상력을 구별하는 규칙을 깨려는 충동을 느끼며, 자신의 방식으로 현실을 재창조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비현실적” 경험을 나누도록 하는 시뮬라크라를 구축한다.
질 들뢰즈는 보드리야르의 이론을 바탕으로 숭고의 현상학을 구축한 1990년 논문 「플라톤과 시뮬라크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뮬라크럼은 관찰자가 지배할 수 없는 원대한 차원, 깊이, 거리를 암시한다… 시뮬라크럼은 그 자체로 미분적 관점을 지니며, 관객은 관점에 따라 변형되는 그 시뮬라크럼의 일부가 된다. 요컨대, 시뮬라크럼 내에 미쳐가는 과정, 한계가 없는 상태로 가는 과정이 접혀 있다…” 풍경화만큼 이러한 서술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곳이 없을 것이다. 풍경화는 현실의 복제품에 그칠 수 없다. 이성적 귀결이 결여된 주관적 경험의 양상, 즉 피할 수 없는 숭고를 드러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