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만머핀은 미국 시카고를 기반으로 선구적인 작업 활동을 펼쳐온 작가 맥아서 비니언(McArthur Binion)의 개인전 《DNA:Study/(Visual:Ear)》를 새롭게 확장한 서울의 전시 공간에서 개최한다. 비니언은 수십 년간 추상이라는 개념을 주의 깊고 혁신적인 방식으로 탐구하며 정체성을 은폐하는 동시에 드러내는 고유한 능력을 제시해왔다. 이러한 비니언의 예술적 실천을 조명하는 본 전시는 리만머핀과 함께하는 작가의 다섯 번째 개인전이자 그중 서울에서 개최되는 두 번째 전시로, 작가의 대표적 회화 연작인 <DNA>와 <Visual Ear>의 신작을 소개한다.
거시적 관점에서 비니언의 작업은 그리드(grid)나 연속적인 형태, 반복과 같은 요소를 작품의 전략적 장치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미니멀리즘 및 개념주의의 특징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조적 전략을 미니멀리즘과 개념주의의 여러 미술가들이 정보 집약적이고 중립적인 것으로 인식했던 지점에서 비니언은 외관상 질서정연하고 냉철해 보이는 형태가 실은 주체성의 형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결정적인 차별점을 갖는다. 각 연작에서 작가는 ‘의식 이면(underconscious)’으로 대변되는 사진 및 문서 위에 격자무늬의 그리드 구조를 중첩시키는 특유의 방식을 선보인다. 이를 통해 그는 보는 이에게 이미지와 텍스트의 가시성을 허용하는 동시에 그 일부를 은폐한다. 비니언의 작품에는 작가 자신의 여권, 출생증명서, 그리고 작가가 사용하던 주소록 등의 개인적 문서가 주로 등장한다. 이러한 문서 중에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음악가 헨리 스리드길(Henry Threadgill)의 곡인 <Brown Black X>의 악보가 포함되기도 했다. 이 악보는 비니언이 스리드길에게 특별히 의뢰한 커미션 작업이다. 재즈가 미술사적 선례보다 자신에게 더욱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할 정도로 음악은 수십 년에 걸친 작가의 작품 활동 기간 동안 그에게 유의미한 영감의 대상이었다.
비니언의 작품은 고유한 리듬을 제시한다. 그의 작업에서 반복은 핵심적 요소로 작업 전반에 걸쳐 연속성(seriality)이 주요한 전략으로 활용된다. 한 폭의 회화 안에서 비니언은 자신이 선별한 특정 사진이나 문서를 화폭 전체에 증식시켜 반복적인 그리드 혹은 기하학적 패턴을 이루도록 만든다. 또한 작가 특유의 연작 단위 작업을 통해 유사한 구도와 색채, 이미지와 문서를 거듭 소환한다. 비니언에게 있어 반복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의사소통의 어긋남을 직접 겪으며 고민해 온 경험을 가진 작가에게 연속성이란 미니멀리즘과 개념주의 미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여기에 개인적 경험을 결부시키며 반복이라는 장치가 가진 정동적 가능성을 제안한다.
비니언의 작업은 미국 남부 지역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스스로를 ‘시골의 모더니스트’라고 칭한 작가는 미시시피주 목화 농장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일찍이 육체노동의 현장을 경험했다. 작가는 이러한 경험이 이후 자신의 예술 양식을 발전시키는 토대가 되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비니언의 작업 과정 또한 농업에 동원되는 노동과 다를 바 없이 노동 집약적이며 물리적인 힘을 필요로 한다. 그는 두껍고 뚜렷한 흔적을 남기기 위해 오일 스틱을 쥔 손에 상당한 압력을 가해 그림의 표면을 눌러 내린다. 이처럼 상당한 힘을 요하는 화법으로 인해 작가는 초기 작업을 할 때부터 양손잡이가 되어야만 했다. 한 손으로 작업하는 동안 다른 손을 쉬게 하고 이를 되풀이하는 의식적인 수련의 결과, 작품은 작가의 손과 신체의 흔적이 엿보이는 역동적인 화면으로 나타난다. 비니언에게 기하학적 구조는 개인의 역사뿐 아니라 노동이라 일컬어지는 작가의 물리적·정신적 예술 행위를 증언하는 암시적인 정체성의 표현으로 작용한다.
《DNA:Study/(Visual:Ear)》에서 비니언은 그의 관심사인 시각적·청각적 표현 방식의 결합을 시도한다. 작가는 과정의 복잡성을 고찰하며 미묘한 리듬과 생동하는 기호들을 통해 개념주의와 미니멀리즘의 전략 또한 주체성을 암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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